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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이야기

한 아기 엄마의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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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 2020-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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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실에 앉으면, 가장 잘 보이는 자리에 붙어있는 편지가 있다. 몇 해 전, 한 환자가 보내준 편지다.


선생님을 뵌 지 벌써 일 년이 훌쩍 지나버렸네요. 시간아 빨리 가라…주문을 외웠는데 돌아보니 소리 소문 없이 가는 게 시간인 것 같아요.


임신 26주. 갑자기 찾아온 몸의 이상 징후에 별일 아닌 줄 알았는데, 근데 큰일이었어요. 암이란 소리에 제 머릿속엔 온통 뱃속 아기 생각뿐이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선생님은 아기보다 눈앞에 있는 환자인 바로 저를 더 많이 걱정하셨던 것 같아요.


치료를 시작하면 아이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몰래 도망쳐버릴까 생각했어요. 그때 저희 남편이 말했어요.


“임우성이란 의사를 한 번 믿어보자. 아이는 정말 괜찮다고 했어.”


수술실 복도에 앉아 저는 뱃속 아이에게 이렇게 말해주었어요.


“아가야, 걱정 마. 의사선생님이 널 꼭 지켜주실 거야. 엄마랑 아빠에게 약속해주셨어. 우리가 의사선생님을 믿어야 선생님이 약속을 지켜주실 거야. 힘내자.”


선생님은 그 약속을 지켜주셨어요. 저와 아이, 두 사람 생명의 은인이세요. 늦은 결혼으로 기다리고 기다리던 아이가 이제 막 저에게 손을 내밀었을 때, 놓을 뻔 했던 그 손을 선생님께서 잡게 해주셨어요.


그렇게 못난 엄마를 만난 저의 아이가 벌써 첫돌을 맞이하였답니다. 다른 아이들보다 작은 체중으로 일찍 태어나 ‘미숙아’라는 꼬리표가 붙었지만, 지금은 그 어떤 아이들보다 잘 자라주고 있습니다. 밥도 저보다 많이 먹을 정도예요.


앞으로도 치료가 이어질 것이고, 제가 할 일이 까마득하게 많지만 저는 두렵지 않습니다. 가슴 한 쪽이 없은들 어떻습니까. 이렇게 예쁜 아들이 저를 향해 웃어주는데요.


임신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긴장되는 임신 중기의 유방암 환자를 치료한다는 것은, 사실 의사인 필자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다. 임신 상태에서는 검사나 마취, 수술, 약물 처방 하나하나가 혹시 태아에게 나쁜 영향을 주지 않을지 살펴야 한다. 일반적인 항암 치료를 할 수 없을 때가 많고, 혹시 모를 합병증이나 조기 진통 가능성도 높다.


하지만 그때 당시 내게 치료만큼 중요한 건, 환자에게 본인과 아기를 살려낼 수 있다는 믿음을 주는 것이었다. 엄마가 절망에 가득 차 모든 걸 포기하게 된다면 어떠한 의술로도 그들을 살려낼 수 없었을 것이다. 다행히 이 환자는 자신과 아이를 살리겠다는 의지가 가득했다. 그리고 모든 가족이 나를 전적으로 믿어줬다. ‘최선’이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그 끝 지점이 있다면, 나는 그것을 넘어서야 했다. 그들의 믿음에 보답하기 위해.


다행히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수술 후 얼마가 지나 조금 이른 시기였지만 건강한 남자 아이도 태어났다. 그 아이의 돌을 맞아 전달해 준 환자의 따뜻한 편지를 매일 읽으며, 나는 내가 환자와 만나는 무섭고도 신성한 수술실의 무게와 가치에 대해 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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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임우성 이대목동병원 외과 교수 / 이대여성암병원 유방암갑상선암센터장